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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통곡하며 책을 불태우다

개울가재 2008. 11. 19. 18:22

신동, 통곡하며 책을 불태우다

김시습, 단종이 물러난 뒤 끝없이 방랑하다

 

[김시습 보기]

[金時習, 1435~1493]

본관 : 강릉

호 :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

별칭 : 법호 설잠, 시호 청간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금오신화》《산거백영》

 

       

        [매월당 영당의 영정]

                                [매월당 영당]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등을 정리했으며 금오산실<경주 용장사>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금오신화》를 지었고《산거백영》을 썼다.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 사대부 집안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1465년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금오신화 창작)

1467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였으나 누차 세조의 부름을 거절하고 다시 낙향

1468년 금오산에서「산거백영」집필

1476년 「산거백영후지」집필

1481년 47세에 환속(다시 속세로 돌아옴)

1485년 「독산일기」집필

1493년 부여 무령사에서 59세로 사망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경주 용장사>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 ·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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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로서 그때당시 단종복위를 모의했던 중심적인 주동자들이고 그 죄로 끝까지 굽히지 않고 처형을 당한 토막난 시체를 모아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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