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
몽근 인생에 몽근 시
*글.나태주(시인.한국시인협회 회장)
1.
임종본 시인은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분이다. 피차 바쁜 일상 속에서 언뜻언뜻 보았지 싶다.
주로 문화 행사나 시낭송회 같은 데서였을 것이다. 첫인상이 좋았다. 사람에게
첫인상이란 매우 중요한 것. 그 이후의 만남까지 첫인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나는 또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서 기운 같은 것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것은 일종의 탐색전 같은 것인데 처음 만나는 사람일 경우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임종본 시인에게서는 웬지 모르게 따스한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정갈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저만큼 서글서글한 여인네 한 사람이 서 있다.
한복 차림이다. 눈매가 곱다. 이윽히 바라볼 뿐 별로 말이 없다. 어쩌면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을까.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하면 짧게 대답한다. 그것도 자분자분 나지막한 목소리다. 대충 이런 느낌이 내가 가진 임종본 시인에 대한 느낌이다. 오늘날같이 사람들이 나대는 걸 좋아하는 시대에 이만 한 인품이 드물다. 내가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가, 충청도 여인네의 오래된 모습을 다시금 대하는 듯하다. 이쪽의 마음까지도 고요해진다.
이번에 시집 원고가 왔다. 원고를 살필 때 처음 시집 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여러 권 시집을 낸 이력이 있는 분이었다. 시집 원고가 정갈했다. 원고를 읽으면서 기억 속의 인물을 떠올려 보았다. 아, 그래서 그랬었구나, 고개가 저절로 주억거려졌다. 내가 즐겨 하는 말 가운데 글이 곧 사람이란 말이 있다. 그 연유야 서양 사람에게 있다 해도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니 내 말이기도 하다. 바로 그 말이 또 머리에 떠올랐다. 글이 곧 사람이다. 임종본 시인의 글이 곧 임종본 시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더러 글과 사람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보기도 하는 탓이다.
2.
글은 인간의 삶, 인생을 벗어나기 어렵고 인생은 자연이나 환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또 자주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요. 글은 또 인간의 자식이 라고, 그건 정말로 그러하다. 글이 몽글다면 그 사람의 인생도 몽근 것이고 그를 받쳐주는 자연이나 환경도 몽근 것이다.
임종본 시인의 시를 처음 대하면 대번에 '몽글다'는 말이 떠오른다. 몽글다. 낟알이 까끄라기나 허섭스레기가 붙지 않아 깨끗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형용사다. 요즘같이 거칠고, 급한 세상에 인생이든 시든 몽근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어쩌면 충청도 떡 수리취 그 풀빛 고운 떡.
한 소쿠리 덕숭산을 담아왔다.
수리취떡 절구에 메로 치고 두 손으로 치댔다.
누구는 떡에서
솔잎 냄새가 난다고 했다.
베적삼 냄새가 난다고 했다.
한입 베어 물면 산이 쩌렁쩌렁
우는 것 같다.
따라온
계곡 물소리가
들릴 듯
떡 속에는
예산 사투리가
하얀 이빨처럼
숨어 있다.
- 수리취떡 전문
참으로 곱지 않은가. 정겹지 않은가. 자연과 인간, 인간이 만든 인공물까지 서로 어울려 평화롭고도 향기로운 세상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하나의 떡이다. 수리취떡, 수리취라는
산나물을 캐다가 넣어서 만든 떡, 그 떡 속에서 자연을 만나고 인간을 만난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세상이야말로 구족具足의 세상이고 마침내 원융圓融의 세상이다. 보시라. 떡 속에서 솔잎 냄새가 난다고 하고 베적삼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는가. 드디어 떡 속에서 쩌렁쩌렁/ 우는 산의 울음을 듣고 계곡 물소리를 듣고 하얀 이빨로 숨어 있는 예산 사투리'까지 듣는다고 한다. 혼연일체, 우아일체 字我一體를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시에서 희열까지를 맛보는 것이다.
하늘빛 그리움으로 물이 들던 날
두 손을 마주 잡고 걸어온 그 길
그것은 아무도 모를 사랑의 뒤란
여름날의 푸성귀처럼
우리들의 추억은 노을이 되어 돌아오고
가을의 안부처럼
익어가는 단풍잎, 창가에 기대어 앉네
가을 안부 전문.
역시 정갈하다. 잊었던 옛 애인이 외국 여행길에 보내준 한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한 감회, 인간이 느껴진다. 아니, 글 뒤에 인간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자연까지도 보이는 듯하다.
누구나의 인생이든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 하루하루가 고생스럽고 참아내기 버겁다. 그런데도 그런 인생을 이렇게 고즈넉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의도가 그만큼 깊고도 맑고도 곱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과 자연, 인생과 현실, 그사이에 이런 시가 칸막이로 있어 준다는 건 매우 축복된 일이다.
구순을 넘은 엄니가
널 낳은 산달이라 몸이 힘들다”
그 말씀이 생각난다.
어느덧 나도 그 언덕에 올라섰다.
40을 바라보는 아들의 생일에
온갖 시름에 드셨던 엄니를
느껴보는 이 저녁
마음 한쪽이 자꾸만
베인 듯 아프다.
엄니, 울 엄니!
-산달 전문.
이번에는 육친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랑은 모친의 사랑,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본능적이면서 힘이 세고 멀리까지 간다. 모친의 사랑이 자식에게로 흐르고 다시 또 그 자식에게로 흐른다. 그리하여 그 사랑은 끝이 없는 강물처럼 간다. 인류의 삶 끝 까지 간다.
시인은 젊은 시절 어머니의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도 어머니의 나이 때를 지나가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깨닫고 배운다. 하나의 추체험이다. 이렇게라도 인간은 조금씩 현명해지고 철이 드는 것이다. 이 또한 고맙지 않은가. 거기에 무한한 감사와 찬양이 따른다. '마음 한 쪽이 자꾸만, 베인 듯 아프다/ 엄니, 울 엄니……!' 절창을 듣는다.
진달래 곱게 핀
고개 넘어
제삿날 아버지랑
큰댁으로 가던 길
길마중 나오던
가슴 털 노란 점박이 새는
지금쯤 어디서 날고 있을까
언덕 너머 초가집
두런대던
그리운 불빛
먼 옛날
내 마음속 수암산
아직 거기 있습니다.
-수암산에 올라 전문.
이번에는 유년의 추억이다. 거기에 아버지가 나온다.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 멀리 가까이 가족들이 모이던 풍경, 지금은 물론 찾아보기 어려운, 전설 같은 옛날식 삶의 모습이다.
시인도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제사를 보기 위해 수암산 이란 산을 넘어 큰댁에 갔던가 보다. 그 기억이 어른이 되고 세월이 가도 잊혀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외로 인생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끝내는 기억만이 인생의 재산이 된다. 이상李箱과 같은 시인은 추억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뜻에서 임종본 시인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 마음의 재산을 아끼며 사실 줄 믿는다.
먼 산
뻐꾸기 울자
감꽃 진다
허공은
작은 꽃잎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루실길
낮달만한
적막이
지고 있다.
- 「감꽃) 전문.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빼어난 작품이다. 한 권의 시집을 통으로 읽어도 이런 작품 한 편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동양의 좋은 시에는 천지인天地人 삼재가 들어 있기 마련인데 이 시가 바로 그렇다. 작지만 울림이 크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가 이런 시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없지 않다.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탁 치고 들어온다.
먼 산/ 뻐꾸기 울자/ 감꽃 진다. 시의 도입을 이렇게 뽑는 것은 보통의 솜씨가 아니다. 어쩌면 뻐꾸기 울음소리가 감꽃을 떨어지게 만드는가!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바꾼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그다음도 그렇다. 허공은 작은 꽃잎' 어떻게 이런 구절이 있을 수 있나. 허공을 작은 꽃잎으로 본 것이 짐짓 놀랍다. 이런 시선은 매우 날카롭고 깊은 시선으로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루실길, 하나의 고유명사, 주소다. 그렇지만 이 특수성은 곧바로 일반성으로 바뀐다. 마음이 있는 독자들은 그 주소를 자기의 것으로 바꾸어 읽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을 보자. '낮달만한 적막이/ 지고 있다.
무릎이 탁 쳐지는 탁월과 쾌재가 있다. '낮달만한 적막이라니? 적막은 보이지 않는 정서 상태다. 그것을 보이는 대상인 낮달로 바꾼 솜씨는 다시금 범상한 것이 아니다. 작지만 큰 세상, 그것이 바로 시다. 칭찬의 말이 머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3.
이 시집을 보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성취감이 있는 작품들로 되어 있고, 2부는 여행시, 3부에는 행사시가 들어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작품이 1부와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없지 않다. 하니의 요구이고 아쉬움이다. 여행시와 행사시는 그런대로 필요성이나 의미가 있겠지만 작품 위주의 시인을 강조할 때는 지양해야 할 대상이다. 이 점을 시인은 알아서 다음책에서 부터는 본격적인 시로만 된 책을 들고 나와 우리를 기쁘게 해주기를 바란다. 모처럼 좋은 작품 여러 편을 만난 기쁨이 적지 않다. 저자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